퐁실퐁실 필링 펠팅
긴 추석 연휴가 끝나고 약간은 날씨가 쌀쌀해진 지난 9월 어느 토요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 집에서는 특별한 수업이 열렸습니다. 7명의 수강생이 둘러앉은 가운데 테이블에는 특이한 물건이 있었는데요. 실뭉치 같기도 한 것이, 공 같기도 하고. ‘펠트(양모)’라고 불리는 이 재료들은 수강생들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총 10번의 수업 중 한 번만을 남겨두고 있다는 ‘퐁실퐁실 필링 펠팅’ 프로그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허란 강사는 이번 수업에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발달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예술 교육이 많아지고 있지만 매체(재료)에서는 한계가 많아요. 주로 미술 활동이라고 하면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을 생각하는 게 보편적이다 보니 회화를 제외하고는 다른 매체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예요.
여러 매체를 접하면서 자신만의 표현을 발굴해내는 것이 예술에선 중요한데 말이예요. 이번 수업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어요. 펠트라는 소재를 활용해 평면 작품은 물론 공예품, 생활 소품까지 만들어 보는 커리큘럼을 기획했기 때문이죠.”
발달장애인들 중에는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많아 처음에는 걱정도 됐다고 합니다. 펠트 작품은 단순하지만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수강생들이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고민이 됐습니다. 하지만 막상 수업을 시작해보니 수강생들은 펠트에 빠져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펠트에 흥미를 느끼고 적응해나가는 이들을 보면서 그런 걱정들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허란 강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펠트에서 느껴지는 감각과, 작품을 만들면서 물을 사용하는 과정이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이 감각을 좋아해 주시는 수강생 분들이 많았어요. 수업은 3시간을 하는데요. 처음에는 빨리 끝냈으면 하는 마음을 보이는 수강생도 있었지만 수업 회차가 진행되면서는 시간이 부족하다고들 하시더라고요. 수업이 끝나고도 남아서 작품을 완성하려고 하는 분들도 생겼고요.”
허란 강사의 말처럼 수강생들은 ‘대만족’하고 있습니다. 수강생 김한빈 님의 어머니 박영숙 님은 펠트 수업이 아들이 유일하게 기다리는 수업이라고 말합니다.
“한빈이가 주중에도 복지관 같은 곳에서 다른 수업을 듣거든요. 근데 펠트 수업 시간에 만든 달팽이만 유일하게 머리맡에 두고 자요. 다른 수업에서 그린 그림들은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추석 연휴에 한주 수업을 쉴 때도 막 아쉬워하고요, 펠트 수업은 언제 하는지 기다리기도 해요. ‘왜 그리 좋으냐’고 물어보니 펠트의 부드러운 촉감이 너무 좋대요.”
10번 가까이 수업을 하면서 허란 강사가 가장 뿌듯함을 느낀 순간은 처음에는 마음을 열지 않았던 수강생이 수업이 진행될수록 강사들과 라포를 형성하고 예술관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라고 합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폭신폭신한 펠트의 감촉처럼 수강생의 마음도 녹아내린 것이지요.
“수강생 중 유난히 낯을 가리던 분이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저희에게 마음을 여는 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분은 유난히 작품을 만들 때 얼굴 표정을 많이 그리세요. 어머님 말씀으로는 그게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리는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이후로 그 수강생분과 대화할 때마다 ‘아, 이분이 지금 제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해요. 그분이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이 표정을 그려내는 것이라는 걸 저희도 배우는 거죠.”
펠트 수업 덕분에 인생에서 의미 있는 한걸음을 내딛은 수강생도 있습니다. 최혜선 수강생의 이야기인데요. 평소 일러스트와 동서양화를 배우면서 미술가의 꿈을 꾸고 있는 혜선씨는 펠트 수업을 수강 중이던 최근 한 회사와 계약을 맺고 미술 작품을 제작해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혜선씨의 작품이 세상에 더 잘 알려질 수 있는 계기도 되고 당장 사회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입니다.
혜선씨는 꽤 오래 예술 활동을 해왔지만 평면이 아닌 입체 작품을 만들어 본 것은 펠트 수업이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번 수업은 특히 색감이나 도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물감과 달리 펠트는 여러 갈래의 실을 배합해서 조색하기 때문에 낯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펠트 작업을 통해 혜선씨는 색감 조합 능력을 더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입체적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역량도 자연스레 키워지면서 평면 작업을 할 때 도형에 대한 이해도도 올라갔다고 합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큰 꿈이 생겼어요. 회사에 취직해 캐릭터 작업을 해 보고도 싶어요. 원래 예술 쪽으로 꿈이 있었지만 이렇게 크진 않았어요. 그냥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이었죠. 그런데 뭔갈 자꾸 만들어보고 상도 받아보고 계약도 맺어보니까 (미술이) 재밌고 더 좋아졌어요. 그러니 자꾸 더 해보고 싶더라고요.”
혜선씨의 꿈이 작게나마 이뤄지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펠트 강의가 계속 이어진다면 전시회가 열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허란 강사는 펠트 강연에서 수강생들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으로 전시회를 해 보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펠트가 가격이 좀 되는 재료라 이번 수업이 만들어진 것만도 많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예요. 다음에도 펠트 수업을 할 수 있다면 결과물을 갖고 전시도 하고 싶은 게 제 욕심이예요. 또 타피스트리처럼 펠트말고도 수업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섬유가 있어요. 소재도 계속 넓혀보고 싶어요.”
수강생들은 벌써 다음 수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 수업시간마다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강사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는 채이서 씨처럼요. 이서씨는 자신의 세계관을 펠트라는 독특한 소재로 펼칠 수 있도록 해준 분들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펠트 수업에서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더 많이 생겨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술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들 하죠. 비장애인들에 비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더 적은 장애인들이 보다 자주 자신의 고유성을 표출하고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한발짝 한발짝 목표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수강생들과 강사님들의 모습을 보면 그 세상이 머지 않았다는 희망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