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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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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저녁이 빛나는 이유✨

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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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저녁이 빛나는 이유

장애인이 가르치고 장애인이 배우는 ‘당사자 야학’





야학 프로그램 수업 현장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강의실에 15명의 수강생이 눈빛을 반짝이며 둘러앉았다.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정신질환과 관련해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나요?” 수준 높은 질문에 수준 높은 답변이 돌아왔다. “바실리아법*정신병원을 점진적으로 폐쇄하고 지역사회 서비스를 펼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이 생겼어요.” 궂은 날씨에도 높았던 참석률과 예사롭지 않은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교실의 분위기는 이 ‘야학’이 다른 정신질환 프로그램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신적 장애 : 발달장애 또는 정신 질환으로 발생하는 장애.(출처 : 장애인복지법)

*정신장애인 : 정신적, 신체적 또는 지적 장애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기능적인 제한을 겪는 개인(출처 : 국제질병분류(ICD-10))




조금은 특별한 야학


2023년 한국장애인재단이 지원하는 ‘정신장애인 역량 강화를 위한 당사자 야학’의 한 장면이다. 사업을 기획해 진행하고 있는 정유석 활동가는 다른 정신질환 사업과 야학의 가장 큰 차이점이 강사의 상당수가 실제로 정신질환을 겪어본 당사자라는 점에 있다고 설명했다.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데만 매몰되지 않고 이들이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스스로를 위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사업의 방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야학 프로그램 담당자 정유석 활동가




"사업을 기획하면서 첫 번째로 신경 쓴 것은 정신장애인에게 ‘저녁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어요. 정신장애인의 삶의 패턴은 주로 저녁을 먹고 약을 복용한 뒤 일찍 잠에 들게 돼요.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에 많은 경우 수면제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저녁에 친구를 만나거나 운동을 하는 등 여가생활을 하기 쉽지 않죠. 야학을 통해 그분들에게 저녁을 되돌려주고 싶었어요. 한 참여자분께서는 저녁에 센터에서 밥도 먹고 수업도 듣고 동료들과 소통하다 보면 집에 가서 우울하거나 외로워할 틈이 없다고 해요."



정신장애인은 고학력인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55.7% 이상이다.*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 보고서그런데 대부분 발병시기가 청소년 후기~20대 초반으로 학업이나 사회적인 입지를 다져야 하는 때라 이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럽게 정신장애인은 학습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데 이를 위한 장소가 별로 없다는 것이 정 활동가의 생각이다.



또 이들은 다른 장애 유형에 비해 동료 장애인과의 교류가 더 많이 필요하다. 이따금 환청·망상·우울 등이 찾아오는 이들의 세계는 비장애인들이 결코 이해하기 힘든 세계다. 그런 부분에 대해 당사자가 마음껏 이야기하고, 서로 교류하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정 활동가는 생각했다.




‘당사자’가 주는 공감의 깊이


보건복지부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 의하면 지난 1년간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한 사람은 약 355만 명명에 달한다. 약 2.9% 수준인 10만 4000명 정도만이 장애인복지법에 따른 장애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의사가 정신장애인임을 판명하기가 어렵고, 장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질병의 종류가 조현병·양극성정동장애·만성우울증·조현정동장애 등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일까. 정신장애인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다른 장애유형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이 발간한 '한눈에 보는 2022 장애인 통계'에 따르면 '정신장애'가 포함된 '정신적 장애인'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6.7%로 4명 중 한 명이 조금 넘는다. 신체외부(뇌병변·안면장애), 감각(시각·청각·언어장애), 신체내부(신장·심장·호흡기·간 등) 등 다른 장애 유형들과 비교해도 수치가 가장 낮다. 2017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의료급여 수급율도 48.5%로 장애유형 중 가장 낮아 전체 장애인 유형에서도 소외돼 있으며 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학에서 '매드스터디'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송승연 강사(한국장애인개발원 부연구위원)는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가 정신질환을 대하는 방식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다.




야학 프로그램 ‘매드스터디’ 송승연 강사




"정신장애인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정신 ‘질환’을 먼저 떠올리는데요. 그런 용어 자체가 의료적 관점이 강합니다. 만약 자신에게 정신적 어려움이 찾아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래도 우리는 취업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가족도 꾸려야 할 겁니다. 그게 삶의 90%를 차지하겠죠. 치료라는 영역은 10%가 될까 말까 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은 그 10%에 모든 관심과 지원이 집중돼 있습니다. 복지나 고용, 주거 서비스 등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체장애만 해도 복지·주거 서비스 지원처럼 장애를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시스템이 주류가 돼 가고 있는데 정신장애 쪽은 아직도 의료적인 시선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정신장애인들이 더욱 큰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장애 그 자체가 아닌, 그로 인해 단절된 자신의 삶을 마주할 때다. 야학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최승완 씨는 조현병 치료를 마치고 다시 사회에 돌아와 취업에 도전한 2019년 가장 큰 상처를 얻었다고 했다. 수년의 공백기는 신입으로서도, 경력직으로서도 ‘취준생’ 승완 씨의 위치를 애매하게 만들었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기존처럼 정직원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고용해 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야학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탄생했다. 정신장애인들이 단순히 치료의 수요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장애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계획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서서히 찾아온 변화


승완 씨는 야학에 참여한 후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병원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은 승완 씨는 야학 수업을 듣기 전에는 집안에만 있거나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서 우울 증세가 심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저녁마다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증세가 점차 나아졌다고 한다.




야학 프로그램 참여자 최승완 씨




"평소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이 일어나곤 했어요. 큰 원인 중 하나가 집안에 나를 혼자 가두는 폐쇄적인 시간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센터에 나오면서 밖으로 계속해서 나오려고 하는 스스로를 발견했고, 그런 점에서 많이 변화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마음도 변하더라고요. 그전에는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었는데 이제는 정신장애인이지만 자기 결정권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회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서울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승완 씨는 2019년부터 환청이 들리는 등의 증상을 겪었다. 병원을 찾은 그는 ‘조현정동장애’를 진단받았다. 처음에는 작게만 들리던 목소리가 어느샌가 24시간 꿈속에서도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고 승완 씨의 업무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현정동장애 : 신경정신질환 중 하나로, 현실감각, 사고, 정서, 행동에 영향을 주는 증상을 포함하는 만성적인 신경정신질환(출처: DSM-5)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답을 하다 보니 승완 씨를 두고 수군거리는 동료들도 늘어났다. ‘이러다 안 되겠다’는 판단에 병원을 방문한 승완 씨는 결국 폐쇄병동에 6주간 입원했고 약물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 나온 뒤로는 재활센터부터 여러 기관의 치료 및 복지 프로그램을 경험한 승완 씨는 야학 수업만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고 말했다.



"야학 강사의 대부분이 실제 정신질환을 겪은 경험이 있어 수업을 듣다 보면 ‘아, 이건 환청을 들어봤던 사람만이 강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다른 재활센터에서 당사자가 아닌 비당사자의 수업을 들을 때는 그냥 프로그램대로만 이끌어 간다고 느꼈어요. 제가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니까 당연한 일이었죠. 제 표현을 할 공간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야학에서는 내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고 그걸 통해서 치유되니까 그런 점이 많이 위로되었어요."




야학 프로그램 수업 현장



마중물이 될 야학


활동가들이 야학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가져오고 싶은 변화는 어떤 것일까? 신기하게도 활동가들은 정신장애인들이 자신의 ‘동료’가 되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정 활동가는 야학 수업의 목표 중 하나가 정신장애인 공동체 속에서 동료를 이끌 수 있는 ‘리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신질환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고, 자신은 물론 다른 당사자를 옹호하며 이끌어 줄 수 있는 기반이 야학 수업에서 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송 강사도 야학에 참여한 당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정신장애인 정책들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야학프로그램 ‘매드스터디’ 송승연 강사



"야학 수업을 들으시는 분들은 학력도 높고 배우려는 의지도 커요. 기존에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정신건강 재활시설이나 프로그램을 이용한 경험도 있죠. 그러다 보니 그분들의 경험을 기초로 스스로 비판적인 연구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그 일환으로 매드스터디 수업 마지막 과제로 '정신건강 정책 중 하나를 뽑아서 비판해 보기'를 출제했는데요. 수업 인원 15명 중에 5~6분 정도가 과제를 해 오겠다고 하셨어요."



깊은 시간을 함께한 덕분인지 승완 씨도 야학 수업이 끝나면 동료 지원가로서 더 적극적인 활동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승완 씨는 야학 수업 참여자이기에 앞서 2명의 동료 장애인을 지원하는 동료 지원가다. 지원가로 활동하면서 좋은 점은 상담을 하며 동시에 내면의 힘이 키워진다는 점이다. 수업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 계기도 수업에서 배운 전문지식이 실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그는 ‘수업 때 배운 것을 파일로 정리해 놓기도 했다’며 자랑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 동료지원가란 당사자 활동가처럼 같은 아픔을 가진 정신장애인을 위해 상담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을 뜻한다.




더 많은 야학들이 생겼으면


정신장애인들을 그저 치료의 수요자가 아닌, 다시 우리 사회로 돌아와야 할 일원으로 바라보는 시도는 분명히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를 위한 제도적 지원도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한 정신장애인 단체는 2016년 대비 올해 당사자 활동가 급여는 3배 이상 증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승완 씨가 처음 동료 지원가로 지원할 당시 2명 중 1명이 합격했고, 올해는 7명 중 2명만이 합격했다고 한다. 정 활동가 역시 야학 수업이 더 많은 이들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배척받던 사회에서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밥도 먹고 공부도 하는 일상이 생기면서 열정을 되찾아 가는 참여자의 모습에서 정 활동가는 큰 뿌듯함을 느꼈다.




야학 프로그램 담당자 정유석 활동가




반드시 재정적 지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 활동가는 정신장애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접근법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병원에서의 약물치료 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장애인들의 유일한 선택이 병원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가 가장 좋은 치료’라는 기치 아래 정신장애인의 자유를 강조한 접근법이 적용되고 있는 선진국처럼 한국에서도 여러 대안적인 모델을 고려해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정 활동가는 말한다. 궁극적으로 정신장애인이 일도 하고 결혼도 하며 인권친화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정신장애인들이 다시 사회로 돌아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고 있는 야학 가족들. 그들의 저녁이 계속 빛날 수 있기를, 더 많은 정신장애인의 저녁에 평안이 깃들기를 소망해 본다.




취재 : 이경은, 선아

사진 : 이용일




협력단체ㅣ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 업 명ㅣ정신장애인 역량 강화를 위한 당사자 야학


교육사업ㅣ잠재력이 최대한 발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교육 사업을 지원합니다. 교육, 학습, 직업 능력 개발을 통해 장애인의 취업 영역을 확대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지역사회에서 진정한 자립에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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